Loading

설립자 추모관

나는 1938년 5월 21일 (음 4.22) 진시(辰時)에 무장면 강남리 세치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세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1940년에 성송면 학천리 어름마을로 이사를 갔는데 집에 비가 새서 다시 학천으로 이사를 갔다. 학천은 외가마을인데 외가는 부유한 가정이었다. 외증조부, 외증조모의 기억은 희미하게 난다. 1945년 성송 암치 성송국민학교에 입학하여 다녔는데 초등학교 1학년생인 내가 학교에서 단체로 풀을 뜯은 기억만 난다. 그 해 8월 해방이 되었고 고창국민학교로 전학하였다. 1학년 때는 공부도 못하고 한글도 모르며 그냥 학교만 다닌 것 같다. 1학년 학년말인 여름방학 에 이르러 형이 한글을 가르쳐 주어서 그때서야 한글을 깨우쳤다.

해방되던 해 아버지께서 고향인 월산으로 이사를 가야한다고 하시면서 월산에 성주를 시작하셨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성송 면사무소에 근무하시면서도 매일 퇴근하시면 바로 고창 월산으로 가셔서 집 짓는 것을 감독하시고 다음날 출근을 하셨다. 거의 매일 70리 길 28km를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동안을 걸어다니셨지만 피곤한 기색은 없으신 것 같았다. 성주에 대한 희망과 의욕 때문인것 같다.

내가 이사 후 7살 때 어느 날 어머니, 누이동생과 나 셋이서 학천을 가는데 고창읍내서 자장면을 처음으로 먹는데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어머님께서는 볼일을 보시고 가겠으니 동생인 영자를 데리고 서서히 먼저 가라고 하셨다. 나는 2살짜리 영자를 업기도, 걸리기도 하면서 고수 쪽으로 가는데 다리가 아파 고수면소재지 직전 언덕에 앉아서 좀 쉬었다가 다시 영자를 업고 학천 쪽으로 가는데 어머니가 안 오신다. 날씨가 어두컴컴한데 무서운 줄도 모르고 고수를 지나 월계쯤 가는데 앞에서 횃불을 들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 있었다. 어머니 일행이었다. 너무 반가웠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학천 쪽으로 가는 트럭이 있어서 가다가 나를 태우려고 했는데 마침 내가 고수 언덕에서 쉬고 있을 때여서 나를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것이었다. 그러니 어머니께서는 우리가 없으니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학천까지 다 가셔서 동네 청년들과 횃불을 들고 찾아왔던 것이었다. 옛날이라 전기도 없을 때여서 밤이면 암흑세상이었다.

초등학교 4.5학년 때 수학을 잘한다 해서 친구들로부터 수학박사 칭호를 얻었다. 아버님께서 수리에 밝으셔서 다른 사람들의 수판보다 아버지의 암산이 더 빠르고 정확하셨다. 아버지의 두뇌를 닮은 것이다. 초∙중∙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 갔다 오면 남는 시간과 주말에는 항상 집안일이나 농사일을 도왔다. 벼도 심고 베고, 물도 품고 보리도 갈았다. 산에 가서 연료용 풀도 베어오고 갈퀴나무, 솔나무도 해 와서 연료에 썼다. 고 2∙3때는 우리 집에 있는 발동기도 내가 운영했다. 고 2때 수학여행은 돈이 없어 못 가고 진개골(석정 앞뜰)에서 벼를 베는데 친구들이 트럭을 타고 수학여행을 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조금도 서글프거나 아쉬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님께서 우리 5남매 교육을 잘 시키기 위해서 절약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서 아버님께도 전혀 서운한 마음은 없었다.

고 2때까지는 농사일, 집안일을 도우느라 시간이 없어서 거의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고 3때에 밤낮으로 공부를 했다. 새벽까지 하면 초롱불이라 코가 까매진다. 어머님은 그만하고 자라고 자꾸 말씀하신다. 고 3때 모의고사 두 번을 보았는데 합계가 월등하게 학년 1등을 했다. 이때부터 동기와 후배들이 나를 알아주기 시작했다.

대학진학은 주위에서 내가 착하다고 신학대학을 가라고 했다. 아버지께서는 검∙판사는 ‘벌’을 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주니 의과대학에 가서 인술을 베풀라고 하셨다. 그래서 전남의대에 지원했다. 전남의대는 110명 중 10등으로 합격을 하였다. 우리 학년은 선배들이 낙제를 많이 해서 보통 160명 정도였다. 이 중 5-6명이 장학금을 받는데 나는 12학기 중 6학기에 장학금을 받았다.

의과대학 졸업 후 대학 인턴에 남으려고 했는데 당시 인턴은 무보수이고 군의관 봉급은 5,000원이 나왔다. 동생 영자가 어려운 사범대학 입학을 했는데 아버지께서는 학비마련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니 내가 대학인턴을 포기하고 군대에 가서 학비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7사단 의무참모시절 전 경호실 차장이었던 이재전 장군이 사단장이셨는데 당시 이북군인 3명이 철책선을 넘어와서 비상경비에 돌입했다. 의무참모까지도 무장하고 철책선 근방에서 잠복경비한 일도 있었다. 1969년 춘천에 있는 101후생병원에서 새벽에 맹장수술을 하고 귀가하는데 기온이 영하27도 인데도 내의도 입지 않았지만 추운 줄도 몰랐다. 군의관 생활도 그렇게 힘든 것이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전에는 군대에서 차 사고로 부상당한 병사가 많았다. 사단장 명령으로 참모들이 1월 1일 아침 최전방 GOP 군인들에게 특식을 보급하기 위해 최전방 고지에 오르는데 상당히 경사가 심한 오르막인데 지프차가 오르다가 후진하다가 딱 정지하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내려서 보니 비탈진 길에 얼음이 얼어 올라가지 못하고 뒤로 밀려나는데 길옆에 나무끌텅이 있어 우측 뒷바퀴가 딱 걸려 더 내려가지는 못하고 차가 멈춘 것이었다. 굉장히 높은 산등성이었는데 내려서 얼음을 파고 흙을 얹고 해서 어렵게 올라가 위문을 마치고 올수 있었다. 만약 그 나무끌텅이 없었다면 나는 그때 차가 전복되어 위태로웠을 것이다. 또 한번은 101 후송 병원 근무할 때 춘천에서 출근을 하려면 탑차, 쓰리쿼터 차를 타고 소양교를 건너야 했는데 그때가 초겨울이었다. 차가 다리 중간에서 갑자기 멈춰서 직 좌회전 후 후진하고 다리 난간에 부딪혀서 위에서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다가 가운데 딱 멈추었다. 나중에 내려서 보니 다리가 춘천 쪽은 얼지 않아 달리다가 다리 가운데서 북쪽으로는 얼어서 미끄러우니 기사가 서툴러 브레이크를 밟은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다행히 사고가 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리의 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 순간이다. 난간이 없었더라면 나는 소양강에 빠졌을 것이다.

나는 내가 편안하려고 누구한테 부탁하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고 원칙대로 사는 사람이다. 제대 1년여 남겨 놓고 월남발령이 났다.

그 당시 사병들은 봉급을 많이 주니 서로 지원을 하는데 군의관들은 서로 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나도 다행히 그때까지는 월남 발령이 나지 않아 다행으로 알고 있었는데 인원이 부족하여 나도 파병발령이 난 것이다. 그래서 늦게 월남을 다녀왔다. 그래서 나는 원래 1971년 3월이 제대인데 1971년 11월로 늦어졌다.

월남에서는 비둘기부대 의무참모였는데 작은 수술은 내가 다하고 환자도 보았다. 월남에서는 다이한 박씨라고 하여 한국 의사들의 인기가 아주 높았다. 가끔 베트공들이 포탄을 쏘고 해서 부대 안에 있는 참호굴에 대피하기도 했으나 피해는 없었다. 대전에서 1974년 조병채 외과를 개업 중 아버님과고창 유지들이 찾아와 당시 의료 오지였던 고창에 와서 인술을 베풀라 말씀하셔서 집사람과 싸우기도 하고 타협도 하여 결국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로 가려고 했던 계획을 포기하고 고창을 위해 5년만 인술을 베풀기로 하고 1978년 5월 고창에서 동산의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동산의원 10년 동안 쉬는 시간이나 휴가나 주말, 명절도 없이 거의 365일 24시간을 병원에 대기하면서 환자를 봤다. 그때만 해도 밤이면 술 먹고 싸우는 사람들이 많아 잠도 못자고 수술할 때가 많았다. 응급환자는 물론이고 제초제를 먹고 대학병원에서 가망이 없다고 퇴원을 하라고 한 환자가 갈 곳이 없다며 죽어도 좋으니 치료를 해달라고 해서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한 적이 있다. 그렇게 완치된 환자가 2명 있었고 그 외에도 많은 응급환자들을 수술하고 치료하였다.

그 후 10년만 하고 서울로 가려던 차에 군 단위 종합병원을 정부에서 유치한다고 하여 매제 정길진 전도의회 의장과 몇몇 분이 고창에서 계속 더 인술을 베풀어달라고 간청을 하여 다시 고창병원을 개원하고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여행 중에 몇 사람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다. 김천 직지사에 갔었는데 머리가 터져 피가 철철 나는 사람이 있어 응급처치를 못하고 당황하고 있는 것을 내가 응급으로 바늘을 가져오라고 해서 소주로 소독을 하고 봉합하여 지혈을 시킨 일이 있었고, 유럽을 다녀오다가 비행기 안에서 이코노믹 신드롬이라고 하여 피가 하지로 몰려 순환이 안 되어 쇼크가 온 환자, 세부 비행장에서 젊은 부부의 쇼크 환자, 동남부 미국 여행 시 쇼크 환자 등을 응급 처치하여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또한 대전 개업 당시 무료로 진료를 해준 복막염 환자가 내가 고창에 이사 온 뒤에 나를 못 찾아 MBC방송에서 나를 찾기에, 내가 전화를 하였더니, 그분이 고창에 와서 나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고맙다고 인사를 받았던 일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 한사람 사는 것 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을 살려내고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것 같다.

고창에 온 이후 1980년 시내버스 승강장 설치, 1981년 읍사무소 청소부에 방한복 지급, 1983년부터 마을회관을 찾아서 무료 진료도 실시했다. 그러다가 의료보험제도가 생겨서 중지했다. 또한 1992년도에는 석천재단 고창병원 장학회 설립, 2000년도 노인 게이트볼 대회 유치와 고창군 애향운동본부의 재탄생, 그리고 정읍 검찰청 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설립 및 초대 이사장 취임, 고창 초등학교 동창회 설립과 초대 동창회장에 취임하여 고창초등학교 개교 100년 기념사업 시행, 고창 중고 동창회장 등 나름대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마음으로 사회에 봉사하며 군민과 함께하는 마음으로 생활하였다. 2016년 11월 도산 안창호 재단에서 주는 도산 봉사상을 수여 받았다. 이 상은 고창군민들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와 믿음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더욱 고창군민의 건강을 지키고 고창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은 생각이다.

특히 금년은 개원 40주년을 맞이하여 대학생 장학금을 추가, 매년 1억원의 장학금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한다. 석천재단 장학회는 고창지역의 인재 발굴 육성과 고창지역 중․고등학교 발전에 기여하고, 군민의 타지 전출을 줄이며 고창지역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1993년 1회 40명 2,000만원을 시작으로 금년인 2018년 26회 86명 1억원, 총 1,284명에게 8억 5,696만원을 지급한다.

나는 지금도 매일 빠짐없이 7시에 출근해서 전 병동 회진을 마친 후 중요사항 체크 등 결재를 한다. 아파서 나오지 않은 적은 거의 없다. 건강하기 위해 나는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담배는 원래 피우지 않았고 요즘은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식사는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으며 과식은 하지 않는다. 나는 가급적 모든 면에서 욕심을 내지 않으나 단, 운동은 욕심을 내고 열심히 한다. 매일 10,000~13,000 보를 걷는다. 그리고 아령 3kg를 이용한 근력운동, 팔굽혀 펴기 50회, 발가락치기 30분 등 이 외에도 스트레칭을 수시로 하고 있다.

나는 자라면서도, 배울 때도, 지금도 남에게 싫어하는 말을 못하는 아주 나약한 사람이다. 앞으로도 나는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까지도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고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에게 건강의 중요성을 말씀드리면서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
병원전화번호 : 063-560-5600 / 팩스 : 063-563-4549 / 병원응급실 : 063-560-5555